본관은 영월(寧越). 조부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신영손(辛永孫)이고, 아버지는 증 판서(贈判書) 신숙거(辛叔琚)이다.
연산군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군자시부정(軍資寺副正)에 올라 왕의 총애를 받았다. 1506년(중종 1) 연산군의 학정에 불만을 품은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에게 내외정세를 세밀히 알려주어 중종반정을 결심하게 하고, 거사일에는 군사를 모아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신수영(愼守英) 등을 격살하고 일을 성사시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천군(寧川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가 되었는데, 탐오하고 군무에 소홀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박원종 등의 구원으로 4개월 만에 다시 서용되었다.
그 뒤 공조판서를 거쳐 좌우참찬을 지내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대간들의 탄핵으로 다시 파직되었다. 이 때 역시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된 박영문(朴永文)이 울분에 못 이겨 자주 신윤무의 집을 찾아와 조정을 비방하고 난언을 많이 하였다.
신윤무는 늘 박영문에게 시기가 아니라며 타일러서 말렸으나, 이와 같은 사실을 엿들은 의정부의 노비 정막개(鄭莫介)의 고변으로 주살되고, 두 아들 신공(辛恭)·신검(辛儉)은 모두 교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