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지금보다 동남으로 2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가 을축년(1922) 장마에 파손된 것을 옮겨 다시 지은 집이다. 6·25전쟁 때 사랑채가 폭격 받아 파손된 것을 근래에 개축하였고, 1994년에 안채를 보수하였다.
해공(海公)은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외무부장, 내무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으로 귀국한 이후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학장, 1948년 제헌국회 제2대 의장, 1955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1956년 민주당공천 대통령후보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던 중 1956년에 급서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韋)이 추서되었다.
생가는 ㄴ자형 사랑채, ㄱ자형 안채가 울타리 안에 있다. 이 {{#173}}형 배치유형은 충청남도 북부와 경기도 지방의 주택에서 나타나는데, 사랑채가 대문간과 함께 시설하는 것이 보통이며, 사랑방은 외부를 향해 개방해서 바깥에서 출입하기에 용이하게 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사랑방 2칸, 대청 1칸, 꺽이면서 방 1칸이고 대문 우측으로도 방 1칸이 있는데 안마당을 향하였다. 안채는 좌측 끝간이 건너방, 대청 2칸, 안방 2칸, 꺽이면서 부엌인데, 지금은 안방 뒤로 다시 방 2칸과 욕실을 부설하여 변화가 생겼다.
방은 삼량, 대청은 오란집이며 기둥은 6치(185㎝가량) 정도, 높이는 8척(營造尺) 가량이다. 간살이도 영조척으로 7·6척 가량이다. 집은 반듯하며 소담하게 생겼고 격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