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양경(讓卿). 심치(沈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응(沈膺)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심정(沈貞)이며, 어머니는 허당(許塘)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7년 별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사관(史官)으로 오래 있으면서 사실대로 기록하였다. 1523년 비변사낭관으로 서북면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우고, 예조좌랑·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어서는 군무에 숙달함을 인정받아 중대한 일은 반드시 도맡아 처리하였다.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修撰)·응교(應敎)를 지내고, 1525년 경상좌도어사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전한(典翰)·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528년 다시 서북 변경의 야인들의 준동이 심해지자 당상관에 올라 만포진첨절제사가 되어 변방방어에 정력을 쏟다가, 야인의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다. 당시 나이 겨우 36세로, 중종은 명신을 잃은 것을 매우 슬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