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안주 출생으로, 1930년 상해(上海)로 건너가 푸탄대학[復旦大學]에 유학하던 중 1932년 1월 상해사변이 일어났다. 안병무는 천도교청우당원으로 푸탄대학 학생의용군에 가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후 중국 19로군에 편입하여 대일전에 참가하였다.
상해 한인학우회에 가입해 재무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37년부터 난징에서 한국국민당의 청년단에 가입하여 『역보(力報)』·『항전일보(抗戰日報)』·『건군반월보(建軍半月報)』 등 잡지에 독립군의 활동과 일본의 침략 사실을 폭로 게재하였다.
1940년 9월에는 『일본 제국주의 철제하의 조선(日本帝國主義鐵蹄下的─朝鮮)』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한국 내의 일본 폭정을 폭로하는 등 문필으로도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40년 9월부터 구이린[桂林]에 있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제6분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그 곳에서 다시 중국 제3전구(第三戰區)에 가입해 대적선전을 담당하였다.
1944년 4월부터는 임시의정원 비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6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부 비서 및 편집위원을 겸하여 충칭[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한편, 안병무는 1937년 국립 광둥중산대학 법학원 정치과를 졸업한 뒤 1941년 중국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의 『첸첸일보(前綫日報)』의 편집조사부장을 역임하였으며, 1945년에는 중한문화협회의 비서,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주불공사의 비서를 지내기로 하였다.
광복 이후 국제연합한국재건단으로 활약했고, 1955년 경제사절단 기술보좌역과 1957년 국립체신학교 부교장도 지냈다. 1966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흥국(興國)중고등학교 교장 등 10여 개 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교육과 종교운동에 헌신하였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문화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천도교 종법사로도 활약하였다.
역서로는 『한일합병사(韓日合倂史)』와 『아인시타인의 생애』 등이 있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서울 국립현창원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