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벽성 출생. 1927년 9월 만주 길림성 주하현(吉林省珠何縣) 오길밀(烏吉密)에서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위촉을 받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혁명청년을 규합, 안내하였으며, 혁명민중 재조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31년부터 1932년 사이에 독립투사양성소인 동광학교(東光學校)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 조직에 적극 노력하였다. 1933년 1월에 일본영사관원이 체포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재빨리 몸을 피하여 상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 뒤 당시 동생 안춘생(安椿生)과 같이 당숙 안경근(安敬根)이 난징[南京]에 재류중임을 확인하고 경근·안정근(安定根)·안공근(安恭根) 등의 지시에 따라 중앙군관학교(中央軍官學校) 구내에서 이 학교 지망생 30여 명과 이들을 지도하는 조완구(趙琬九)·차이석(車利錫)·엄항섭(嚴恒燮) 등 임시정부요인을 만나 합숙생활을 진행시키면서 보좌임무를 수행하였다.
1935년 여름 김구(金九)와 같이 공근으로부터 동삼성에 가서 반만항일운동을 전개하라는 특명을 받고 같은 해 9월 흑룡강 난서현(蘭西縣)에 도착하여 삼합(三合)농장주인 오영렬(吳永烈)과 제휴, 청소년을 모아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뒷날 독립투쟁에 직접 투입, 활용할 수 있도록 정예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35년 12월 일제의 주구 정준수(鄭駿秀)의 밀고로 인하여 일본경찰에 잡혀 4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그뒤 요시찰인물 제1호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 속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