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몽여(夢與), 호는 취치(醉癡). 안자흠(安子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사영(安士英)이고, 아버지는 정랑 안묵지(安默智)이다.
1615년(광해군 7) 진사가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대교(待敎)·설서(說書)·헌납(獻納)을 거쳐 이조좌랑·이조정랑·지평(持平)을 지냈다.
1613년 유학(幼學)의 신분으로 진사 이위경(李偉卿) 등과 함께, ①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역적모의, ② 김제남(金悌男)의 토죄(討罪), ③ 폐모론(廢母論: 안으로는 巫術로 남을 현혼시키고, 밖으로는 역적모의에 가담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도의를 끊음) 등을 내용으로 한 소를 올려 당시의 여론을 자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폐모론의 수창자(首唱者)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유배, 위리안치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