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정숙(定叔). 안상억(安相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윤적(安允迪)이고, 아버지는 목사 안종해(安宗海)이다. 어머니는 윤하교(尹夏敎)의 딸이다.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다.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봉직하다가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고, 1763년에 헌납(獻納)이 되어 장령(掌令)을 거친 뒤, 1764년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65년에 사간·집의(執義)·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는데, 마침 제주도에 기근이 들어 양리(良吏)를 뽑아 보내야 했다. 이에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친히 어명을 받고 가서 그 폐(弊)를 없애고 화합 정치를 잘 하였다. 그러나 옥사(獄事)에 위반된 점이 있어 파직당하였다. 중앙으로 돌아오려고 하자, 그곳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어 1767년에 형조참의·대사간이 되었다. 왕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조참(朝參: 매월 정기적으로 임금에게 백관들이 문안을 드리고 정사를 아뢰는 일)을 행할 때, 이에 불참한 위율(違律)로 해남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개월 뒤 다시 복직되고, 대사간·병조참의 등을 거쳐 여주목사를 지냈다.
자신에 대해서 몹시 엄하였기 때문에 당시 파당을 이루던 시파(時派)·벽파(僻派)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으며, 안표의 깨끗하고 신중한 행동에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