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직후에 북만주의 청림교(靑林敎) 교도들이 주축이 되어 청년교도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항일군사활동을 준비하였다. 청림교는 동학의 한 교파로 만주 길림(吉林)과 북간도 지방에서 강력한 항일의식을 가지고 교세를 확대시키고 있었다.
이 단의 조직은 단장에 신포[申砲, 일명 아소래(我笑來)]였고, 간부는 임창세[林昌世, 일명 갑석(甲石)]·김광숙[金光淑, 일명 병주(秉圭)] 등이었다. 본부는 연길현(延吉縣) 동불사(銅佛寺)에 있었으며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단원이 2만 명에 달하였다고 하나 임시정부에 보고된 것은 확실하지 않다.
무기는 없이 군복 수천벌을 만들어놓았다는 점으로 보아 군사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1931년 9·18만주사변 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을 도와 활약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일제의 한 보고서에는 임창세가 단장으로 야단을 통솔한 것으로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