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중화(中和). 호는 소벽(少碧). 일명 양묵(楊墨)·양명진(楊明鎭). 평안남도 평양 출신이다.
1915년 상해로 망명했다가 191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재미대한인국민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1918년 미국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해 재미한국유학생회에 가입하였다.
1921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 안창호(安昌浩)의 가르침을 따랐다. 1929년 다시 상해로 건너와 안창호·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화남(華南) 및 남양군도(南洋群島) 시찰특파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혁신사(革新社)를 창립해 문화사업도 전개하였다.
1930년 화남한국유학생회 지도고문으로 선임되었고, 월간지 『한성(韓聲)』을 발행하는 한편, 『삼민주의(三民主義)와 손문(孫文)학설』을 번역, 출판하였다. 1931년 1월 6·7일 이틀간 상해에서 개최된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遠東大會)의 준비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임시의정원의원 중국대표로 선임되었으며, 193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의 화남특파원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1936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1937년 10월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국무원(國務員)을 개선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위원회를 특설하자 선전위원이 되었다.
그 해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장·훈련부장을 역임하였다. 194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생계부(生計部) 차장에 취임해 교포의 생활과 지위 향상을 도모하였다. 광복군이 결성되었을 때에는 총사령부 참사 겸 정훈처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발전에 기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예산결산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4년 충칭[重慶]한국인기독교청년회이사 겸 덕육지육부장(德育智育部長)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1946년 5월에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