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여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 일제강점기
대한제국기 때, 광산군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의병장.
이칭
  • 이칭양진여(梁辰女), 양진여(梁鎭汝)
인물/근현대 인물
  • 사망 연도1910년(순종 3)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862년(철종 13)
  • 출생지전라남도 광산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박성수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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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때, 광산군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의병장.

개설

일명 양진여(梁鎭汝, 梁辰女). 전라남도 광산(지금의 광주광역시) 출신. 의병장 양상기(梁相基)의 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8년 7월 20일경 광산군에서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박성일(朴聖日)·김익오(金益五) 등으로부터 군자금과 군량을 징발하였다.

같은 해 11월중 광산군 대치산에서 일본 수비대를 맞아 혈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11월 24일에 양진여부대를 포함한 의병연합부대 300여 명이 추월산에서 일본군과 전투하였지만 역부족으로 크게 패배하였다.

1909년에는 부하 100명을 이끌고 강판렬(姜判烈)부대 및 전해산(全海山)의 의병부대 270명과 더불어 장성·담양을 습격하고, 뒤이어 일본군의 본거지인 광주(光州)를 공략하려고 하였으나 적이 대병력를 배치하여 전력을 정비하므로 중단한 바 있다.

같은 해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무동촌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던 중 잡히고 말았다. 1910년 3월 5일 대구공소원 형사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5월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 - 『독립운동사자료집』1·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1)

  • - 『독립운동사』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 - 「대구공소원형사부판결문(大邱控訴院刑事部判決文)」

  • - 『朝鮮獨立運動』Ⅰ(金正明 編, 原書房,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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