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7년(광해군 9) 역적의 뿌리를 뽑는다는 명목 아래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만들려는 이른바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과(司果)로 있으면서 원종(元悰)과 함께 풀을 제거할 때 뿌리를 뽑지 않으면 언제나 다시 나게 마련이라고 하면서 이에 적극 찬동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 허균(許筠)의 심복이 되어 반란을 일으키려는 음모에 가담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여러 차례 국문을 받던 중 김내용(金乃鎔)과 함께 불복하고, 형장에서 죽음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