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양화나루는 당산철교 북단 인근에 위치해 있었고 안양천과 한강이 합류하는 남단은 양화나루의 대안으로 이용되었다. 마포의 양화나루는 고려 때부터 한강의 중요 도선장으로 이용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양천, 강화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으로 도승(渡丞 : 조선시대 나루터를 관리하던 종9품 벼슬)이 파견되어 나루를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그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1710년(숙종 36)에 어영청 소속의 별장(別將)이 파견되었다. 1754년(영조 30)에는 한강 수로와 한성 방어의 요충지로 지정되어 어영청 관할의 양화진(楊花鎭)이 설치되면서 군사 100명이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 양화진에는 배 10척이 배정되었으며, 그 하류의 공암진(孔岩津)과 철곶진(鐵串津)도 이곳 관할이었다.
양화나루 위쪽의 잠두봉은 봉우리 모양이 마치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고, 용두봉(龍頭峰) 또는 들머리[가을두(加乙頭)]라고도 불리었다. 이곳은 한강 연안 중에서도 양화나루 아래에 있던 망원정(望遠亭)과 함께 빼어난 절경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양화 나루에서 밟는 겨울 눈’에 대한 시는 한도십영(漢都十詠)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애상하였다.
그러나 1866년(고종 3)에 제1차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면서 양화나루와 잠두봉의 역사는 일변하게 되었다. 이 해 로즈(Roze)가 이끄는 프랑스 극동 함대가 조선 원정을 시도한 끝에 8월 18일(양력 9월 26일) 양화진을 거쳐 서강(西江)까지 올라왔다 중국으로 돌아갔고 9월에 다시 강화를 침략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조선 정부는 이 일련의 사건이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였고 프랑스 함대가 거쳐간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는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묻고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잠두봉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칼날을 받은 곳이라는 뜻에서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천주교회에서는 순교지인 이곳을 1956년에 매입했고, 1962년에는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병인 순교 100주년(1966년)을 기념하여 1967년에 성당과 순교기념관을 건립하고 가톨릭 성지(절두산 순교 성지)로 조성하였으며, 1968년 이래로 한국 성인들의 유해를 옮겨와 안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