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여적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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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조선후기 여적당 경수가 창건한 암자. 법주사.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장충식 (동국대학교, 미술사)
  • 최종수정 2024년 06월 20일
보은 법주사 여적암 다층청석탑 미디어 정보

보은 법주사 여적암 다층청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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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조선후기 여적당 경수가 창건한 암자. 법주사.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산내 암자이다. 1694년(숙종 20)에 여적당(汝寂堂) 경수가 창건하였다. 그러나 여적암에 고려시대 조성으로 추정되는 보은 법주사 여적암 다층청석탑이 전하므로 그 이전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은 법주사 여적암 다층청석탑은 2009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암자는 산중에서 가장 부유한 암자였으나 역대 주지들이 물욕에 집착하여 남에게 베풀 줄을 몰랐다. 어느 때 주지의 제자로 있던 여적은 스승의 탐욕을 깨우치기 위해 주먹밥 아홉 개를 만들어서 스승과 함께 수정봉으로 갔다. 그곳에서 여적은 구멍 뚫린 바위 앞에 앉아 여적암 역대 주지의 이름을 차례대로 부르며 주먹밥을 한 개씩 던지자 큰 뱀들이 차례대로 나와서 받아먹고 다시 구멍으로 들어갔다. 일곱 번째에 나오라고 부른 이름은 주지의 은사(恩師)였으므로, 주지는 뱀으로 태어난 스승을 보고 놀라 여적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여적은 역대 주지들이 욕심이 많아 뱀이 되었지만, 죽어서도 여적암의 재물을 잊지 못하여 여적암이 잘 보이는 수정봉에 산다고 하고, 남아 있는 한 구멍이 현재의 주지가 죽어서 살 곳이라고 하였다. 그 뒤 주지는 대법회를 열어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고 수행에 열중하였는데, 그때부터 여적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뒤 응익(應翊)이 1901년과 1907년에 각각 중건하였고,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8년에 수도승이 초암을 짓고 살던 것을 1964년 행담(行潭)이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삼성각(三星閣), 요사채 등이 있으며, 법당에는 아미타불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 밖에도 높이 70㎝ 정도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청석(靑石)의 소형탑 1기가 있는데, 중앙에는 찰주(刹柱:사찰을 표시하는 기둥)를 끼웠던 구멍이 사방 5㎝ 크기로 있다. 현재는 기단과 상륜부가 없는 다층 소탑이다.

참고문헌

  • - 『전통사찰총서』(사찰문화연구원, 1998)

  • - 『사지』(충청북도, 1982)

  • - 『한국의 사찰』 5 법주사(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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