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자(擧子)들이 낸 시권을 100장씩 책으로 묶어『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천축(天軸)·지축(地軸) 등의 자호(字號)를 매겨 봉미관(封彌官)에게 넘기면 봉미관은 시권의 양편(兩編)에 자호를 매기고 감합(勘合)을 그린다.
그 뒤 피봉(皮封)과 제문을 분할하여 피봉은 봉미관이 궤짝에 넣어 보관하고, 제문은 등록관(謄錄官)이 서리로 하여금 붉은 글씨로 바꾸어 쓰게 하는데 이것을 역서라 하였다.
이 역서법은 1365년(공민왕 14)부터 1835년(헌종 1)에 이르기까지 소과(小科)와 알성시(謁聖試)·정시(庭試)·춘당대시(春塘臺試) 등 친림과(親臨科)를 제외한 문과에는 모두 실시되었다.
역서가 끝나면 사동관(査同官)이 본초(本草 : 수험생이 쓴 답안), 지동관(枝同官)이 주초(朱草)를 가지고 틀린 데가 없나 조사한 뒤 주초만 시관에게 넘겨 채점하게 하였다.
그런데 세도가의 자제들 중에는 잘 아는 서리를 등록관이나 봉미관으로 보내고 자기의 하인이나 노복들을 장옥(場屋)의 군졸로 보내어 역서할 때 서리로 하여금 시권을 고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