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5수. 형식은 대체로 평시조의 3장 6구식의 정형을 지키고 있다. 본래 이 작품들은 『갈봉문집(葛峯文集)』에 다른 시조와 같이 실려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갈봉문집』에 실린 시조 중 첫번째 시조는 그의 다른 작품들인 「산중잡곡」 가운데 있는 서른네번째 것과 완전 일치한다. 따라서,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5수의 시조가 「영회잡곡」으로 일컬어진다. 늙음을 탄식하고 산중생활의 한가함을 노래한 것으로 보아 만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대표적인 한수를 살펴보면, “늘거 병든 몸이 이 산정에 누어 이셔/세간 만ᄉᆞ을 다 이저 ᄇᆞ렷노라/다몬당 ᄇᆞ라ᄂᆞᆫ 일은 벗오과다 ᄒᆞ노라.”, “내 몸이 병이 하니 어늬 버지 즐겨 오리/예부터 그러ᄒᆞ니 ᄇᆞ라도 쇽졀없다/두어라 풍월이 버지어니 글로 노다 엇지료.”, “산중에 버지 업서 풍월을 벗삼으니/일준쥬 ᄇᆡᆨ편시 이 내의 일이로다/진실로 이벗 곳 아니면 쇼일 엇지오.”로 되어 있다.
이들 작품의 특색은 표기가 모두 한글로 된 점에 있으며, 다만 그 말씨에는 한문투가 많이 섞인 편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산중잡곡」에 나타난 한글전용현상은 우연의 일치로 보인다.
한편, 『갈봉문집』의 대부분 내용은 그가 속한 가족의 문집인 『용산세고(龍山世稿)』 3책 6권 안에 3·4권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 「영회잡곡」이나 기타 국문으로 된 가사와 시조는 거기에 실려 있지 않다. 이것은 뒷날 그의 유고를 편찬한 자손들이 한글로 된 글을 하대한 결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