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에는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절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신라시대에 창건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기복사찰(祈福寺刹)의 구실을 하였고, 고려 말에는 13종중의 하나인 시흥종(始興宗)에 속한 사찰로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고 한다.
1677년(숙종 3)에는 화주(化主) 경열(敬悅)이 중수하였고, 1917년에는 주지 도현(道玄)이 폐허 직전에 놓인 이 절에 부임하여 빼앗겼던 사유지(寺有地)를 찾고 법당 등의 당우를 중수하였다. 그러나 대찰이었던 이 절은 6·25 때 전소된 뒤 복구되지 못하였다.
현재 절터에는 주춧돌과 거대한 부도 1기, 탑비만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부도는 높이 2.5m, 둘레가 약 4m에 이르는 석종형(石鐘形)부도로서 연화문(蓮花文)이 새겨져 있으며, 석종형부도로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대형부도이다. 이 부도 앞에는 부도의 주인공과 관련된 석비가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 부도와 석비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