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인조 14) 이호민의 아들 이경엄(李景嚴)과 조카 이경의(李景義)가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이민구(李敏求)의 서문, 권말에 이식(李植)의 유고후제(遺稿後題)가 있다.
15권 8책. 목활자본. 국사편찬위원회에 있다.
권1∼6에 시 1,031수, 권7에 부(賦) 3편, 표전(表箋) 9편, 논(論) 2편, 책문(策文) 6편, 서(序) 14편, 권8에 기(記) 6편, 발(跋) 12편, 설(說) 1편, 찬(贊) 3편, 명(銘) 5편, 서(書) 8편, 소(疏) 15편, 권9에 차(箚) 35편, 권10에 교서 11편, 권11에 계사(啓辭) 8편, 헌의(獻議) 6편, 권12에 주문(奏文) 13편, 자(咨) 8편, 권13에 게첩(揭帖) 30편, 권14에 정문(呈文) 27편, 권15에 묘지 4편, 묘갈명 3편, 비명 3편, 제문 38편, 부록으로 시장(諡狀)과 묘지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대개 임진왜란을 당해 동란의 착잡한 비애를 형상화한 것으로, 대부분 우국충정의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용만행재문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聞下三道兵進攻漢城)」은 의주로 피란하는 왕을 수행하면서 지은 대표적 작품으로, 문학사에서도 거론되고 있다.
남용익(南龍翼)은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이 시에 대해 “당시의 동년배들이 감히 지으려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라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그 뛰어남을 지적한 바 있다. 김택영(金澤榮) 역시 “고금에 드문 훌륭한 작품으로, 비록 이백(李白)·두보(杜甫)라도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훼궤(毁潰)된 인간사를 차탄(嗟歎)하는 애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남도(南道)의 군사들이 한양성 탈환을 위해 공격하는 것을 보고 그 감회를 읊었다. 이밖에 「기성송인시(箕城送人詩)」·「제백련사법상권(題白蓮寺法尙卷)」 등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산문에 대해 이식은 서문에서 “문장에 바탕과 꾸밈을 구비하였다.”고 하였다. 이민구는 “전인의 궤적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글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언급하였다. 특히,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에서 “교서가 운문에 가깝다.”고 하여, 여러 산문 문체 가운데에서도 교서를 특히 잘 지었다고 지적하였다.
논 가운데 「노의불맹랑살인론(老醫不孟浪殺人論)」은 노련한 의원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빌려 신진기예(新進氣銳)의 연소배들의 경박함을 지적하고, 풍부한 경험과 신중한 처신을 중시해야 됨을 강조한 글이다. 서의 「제묘축세년계서(題卯丑世年契序)」·「월음리계권서(月陰里契卷序)」·「제효경전계축서(題孝敬殿契軸序)」·「풍양건천리동계서(豊壤乾川里洞契序)」 등은 당시 계의 실상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
발의 「봉사일본시첩발(奉使日本詩帖跋)」은 김성일(金誠一)이 일본에 갔을 때 지은 시에 대한 감상을 적은 것이다. 명의 「안경명(眼鏡銘)」은 중국 사람들이 안경을 사용하는 것을 소개하고 안경을 칭송한 글이다. 안경에 대한 자료로서는 비교적 초기의 것에 속하므로 참고할 만하다.
서(書)와 소(疏)는 임진왜란 중에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므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권9∼14에 걸쳐 수록된 차·교서·계사·헌의·주문·자·게·정문 등은 이 책의 핵심적 내용으로, 임진왜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편집 과정에서 경연 강의, 상소문 등 빠진 부분이 많기는 하나 임진왜란 관계 사료로서, 그리고 당시의 한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