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부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태사국, 판관후서사, 도첨의찬성사 등을 역임한 점술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04년(충렬왕 30)
본관
복흥(復興: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
주요 관직
태사국|판관후서사|도첨의찬성사|복흥오씨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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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후기 태사국, 판관후서사, 도첨의찬성사 등을 역임한 점술가.
개설

복흥(復興) 오씨(伍氏)의 시조(始祖)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대대로 태사국(太史局)의 벼슬을 하는 집에 태어나 충렬왕(忠烈王) 때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로서 사일(社日: 토지신을 제사하는 날)을 변경시켰다.

다음 해에 종묘에 합제(祫祭: 조상의 신주를 천묘에 함께 모셔 제사 지내는 일)하고 죄수를 사면하려고 할 때 공주가 참석하려 하자 불측한 염려가 있을까 두렵다고 하면서 공주의 참석을 중지시켰다. 1278년에는 공주가 재신(宰臣)과 추신(樞臣)을 불러 궁실을 짓도록 하자, 불길해서 택일할 수 없다고 주장해 공주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파직되었다.

문창유(文昌裕)와 함께 서경(西京)에 더위를 피할 터를 잡았고, 다음 해에는 화성이 달을 가렸으니 보통 재변(災變)이 아니라고 하면서 반승(飯僧: 고려시대에 궁중에서 중에게 음식을 대접하던 일)과 불교를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되니 시설을 경영하는 일을 모두 삼가도록 하여 재변을 없애라고 주장해 그대로 실행되었다.

1281년에는 용화원(龍化院)에서 고기가 수없이 죽자 “원종(元宗) 15년에 동지(東池)에서 이와 같은 괴변이 있자 원종이 세상을 떠났다.”라고 하며 왕에게 수신(修身: 자신을 닦는 일)과 반성을 청하였다. 재변이 있을 때마다 간절하게 간하니 왕이 오윤부를 꺼렸다.

1283년 궁중이 불타자, “어찌하여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을 알았는가?” 하고 왕이 묻자 “이것은 하늘의 꾸짖음이니 오히려 작은 재변”이라고 하였다. 같은 해에 또 천변(天變)이 무서우니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설치하도록 건의하였다.

1288년에는 별에 괴변이 있음을 아뢰었더니, 왕은 공주의 식읍(食邑)인 안동(安東)·경산부(京山府)의 베와 비단을 좌창(左倉)으로 돌려 백관(百官)의 녹봉(祿俸)에 충당시켰다. 얼굴이 못나고 말이 적었으나 점을 치면 반드시 맞아 임금의 신임을 받았고, 성품이 꼿꼿해 아첨 할 줄 몰랐다. 그 뒤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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