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고인돌 1기가 지정되었다. 인근의 피실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고분 유적과 함께 ‘옥천 석탄리 유적’이라고 한다. 안터 유적은 고인돌과 선돌이 함께 있는 유적으로, 1977년 충북대학교박물관이 대청댐 수몰지역 발굴작업의 일환으로 조사하였다.
12월 2∼13일까지 고인돌과 선돌이 같이 발굴되어 당시 사람들이 만든 축조과정과 이를 통한 믿음과 의식의 문제가 밝혀지게 되었다. 고인돌은 3기가 있었다. 서로 그 형식이 달라서 강 가까이에 탁자모양(북방식), 중간에 묘표지, 가장 높은 곳에 바둑판모양(남방식)이 있어 높이에 따라 형식이 다른 것이 주목된다.
발굴을 한 제1호 고인돌은 탁자모양의 형식으로 화강암의 뚜껑돌의 생김새는 거북모양이고, 크기는 320㎝×210㎝×33∼36㎝이며 서북 5° 방향으로 놓여 있었다. 유구에서는 말안장모양의 갈돌대 · 돌자귀 · 그물추 · 숫돌 · 가락바퀴 · 눈돌 및 혼성편마암의 자갈돌로 만든 구멍쪼으개, 여성을 나타낸 얼굴조각 예술품, 업의 표지로 해석되는 두꺼비 위팔뼈, X자 모양 새긴돌, 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로 보아, 굄돌 안의 유구에서는 주로 식생활에 관한 것이 나오고, 바깥의 유구에서는 의식적인 유물이 나와 의도적인 유물배치가 있었음이 주목되었다. 그리고 출토유물과 얼굴모양 예술품으로 보아, 묻힌 사람은 여자로 해석되었다.
또한 유구 둘레에는 붉은 흙이 덩어리 상태로 뿌려져 있었다. 또한 인디언의 장례습속에 있어서의 색 배치와 같이 동쪽은 흰색, 서쪽은 붉은색, 남쪽은 초록색, 북쪽은 검은색이 되도록 유물의 색을 배치한 것이 발견되었다.
선돌은 고인돌에서 210m 떨어져 있다. 크기는 195㎝이고 윗부분이 밋밋해 여성으로 해석되며, 가운데 부분에 쪼으개로 지름이 90㎝ 되는 원을 만들어 놓은 것이 주목된다. 그런데 이 원은 선돌 둘레를 손질하여 배부른 사람을 나타내고, 전체 모습이 임신한 것으로 해석되어 안터 고인돌에 묻힌 사람과 연관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안터 고인돌과 선돌은 같은 시기에 세워졌으며, 고인돌 유구에서 암사동 빗살무늬토기보다는 무늬가 성근 상태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볼 때, 후기 신석기시대에 만든 것으로 해석된다.
피실 유적은 대청댐수몰지구 유적발굴조사의 일환으로 1977년과 1978년 2차에 걸쳐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하였다. 당시는 외관이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임을 확인했을 뿐, 그 내부에서 묘곽시설이나 매장유물을 전혀 발견하지 못해 의사고분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이 유적은 피실나루터에서 서남쪽으로 약 1㎞ 떨어진 금강 좌안의 좁은 충적대지와 강변 모래사장의 경계지점에 축조되어 있다.
타원형에 가까운 원형 봉토의 크기는 동서 길이 26.5m, 남북 너비 20.5m, 높이 4∼7m로서 삼국시대의 고분들과 비교할 때 조금도 손색이 없는 웅장한 규모이다. 봉토는 금강 하상(河床)에 형성된 사질토를 석괴(石塊)조각 하나 섞지 않고 그대로 쌓은 후 그 위를 석괴로 덮었다.
적석층(積石層)의 석괴들 중에는 한 사람의 힘으로 운반하기 어려울 정도의 것들도 적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한 겹 또는 두 겹쯤 되는 두께로 견고하게 쌓아올렸다. 이 피복적석층(被覆積石層)은 이미 파괴당해 없어진 부분들이 적지 않았고, 남쪽 측면의 경우는 주민들에 의해 봉토까지 대량으로 깎여진 상태였다.
출토유물로는 표면의 적석층과 흑갈색 부식토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간돌도끼[磨製石斧] 1점 외에 민무늬토기조각 및 삼국시대의 타형문토기(打型文土器) 조각이 각각 20점 정도씩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표토층 출토품으로서 봉토축조 때 주변지역에 산재해 있던 것들이 섞여 들어간 것으로 판단된다.
봉토 내부에서는 전혀 유물을 발견하지 못해 현재 이 유적을 고분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고 그 용도나 목적에 대해서도 아직 추측조차 어려운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