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道義)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임진왜란 직후에 중창되었으며,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송광사 개창비(開創碑)에 의하면 송광사는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점지(占地)되었고 1622년에 중창되었다. 당시 중창에는 덕림선사(德林禪師)를 중창주로 하여 응호, 승명, 운정, 득순 등이 참여하였다. 대웅전을 중창한 후 벽암(碧巖) 각성대사(覺性大師)를 초빙하여 50일간의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모여 시주함으로써 1636년(인조 14)에 이르기까지 계속 큰 불사가 이루어져 송광사는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대공덕화주(大功德化主)인 벽암은 당대의 최고 승려로서 병자호란 때 의승군을 소집하여 서울로 진군하였고, 남한산성을 쌓을 때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서 승군들을 이끌고 성을 완성하였던 승병대장이었다. 그가 송광사의 중창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 사찰의 중창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적 결집을 새로이 공고히 하는데 유익하였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적 배려와 재정적 후원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조성기를 보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귀환과 국난으로 돌아가신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기원하고 있어 호국도량으로서 송광사의 성격을 보여준다.
대웅전은 1623년에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2층 불전이었으나 건물이 기울어 다시 중수되면서(1814년 또는 1857년) 지금과 같은 단층 건물이 되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며 추녀에는 활주를 받쳤다. 장대석 외벌대로 낮게 기단을 조성하고 덤벙주초에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정면은 5칸 모두 두짝 분합문을 달았다. 기둥을 높게 하여 문인방 상부와 창방 사이에는 사방을 돌아가며 벽화를 그렸다. 이와 같은 상벽의 설치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비슷한 규모의 불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공포는 다포계 구조이다. 주칸마다 한 조씩의 간포를 배치하였다. 외 3출목 내 4출목 구조로서 살미는 가늘고 곡선진 앙서형이며 내부는 모두 연봉을 초각하여 장식하였다. 그러나 후면의 공포는 좌우 퇴칸을 제외한 어칸과 협칸의 쇠서 모양이 화암사 극락전 배면의 공포 하앙재와 같이 사절(斜截)하여 간략히 처리되었다. 전면에 비해 후면의 공포를 약화시키는 것은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대웅전의 내부는 평주열보다 뒤로 후퇴시켜 4개의 고주를 세우고 후불벽을 친 후 그 앞에 가로 3칸, 세로 1칸 크기의 수미단을 구성하고 거대한 삼세불을 봉안하여 법당의 내부가 상대적으로 좁아 보인다.
불상 위 천장에는 간단한 운궁형 천개를 가설하였다. 천장은 중앙 3칸이 우물천장이고 주위는 빗천장이다. 중앙의 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조각, 판형으로 새겨 부착한 게, 물고기, 거북 등이 있고, 빗천장에는 주악비천도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마치 천장 전체가 하나의 천개처럼 법당 안을 장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