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규(王規)는 광주인(廣州人)으로, 태조에게 자신의 두 딸을 각기 비로 보내고 태조의 아들 혜종(惠宗)에게도 딸을 시집보냈다. 그는 태조와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사이의 아들이자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에 앉히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943년(태조 26)에 태조가 죽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은 극도로 불안하였다. 혜종은 태자 때부터 강력한 호족 출신인 박술희(朴述熙)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으나, 왕권을 노리는 적대 세력은 많았고, 더 강력하였다. 왕규는 혜종의 후견 세력인 박술희 세력을 제압하고, 왕위를 탈취하기 위해 노골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요컨대, 혜종 대의 정정(政情) 불안과 왕위 쟁탈전의 원인은 혜종의 세력 기반이 미약한 데 있었다.
왕규는 광주(廣州)를 기반으로 한 호족 출신으로 태조를 섬겨 대광(大匡)까지 되었다. 또한 두 딸을 태조의 제15·16비(妃)로 들였는데, 제16비는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았다. 이처럼 왕규는 강력한 호족으로, 왕실의 외척으로서 태조 만년에는 막강한 실력자로 있었다. 그는 태조에게는 충성했으나, 혜종의 왕권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혜종을 죽이고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혜종 살해를 시도하였다. 한 번은 혜종의 침실에 자객을 잠입시켜 죽이려 했는데, 마침 혜종이 잠에서 깨어 자객을 한 주먹에 때려 죽여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또, 한 번은 직접 무리를 이끌고 밤에 혜종의 침실을 급습했으나 혜종은 이미 다른 데로 거처를 옮긴 뒤였다. 혜종은 최지몽(崔知夢)이 무슨 변이 있을 테니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피한 것이다.
왕규의 세력이 혜종의 왕권을 압도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세력 기반이 약한 혜종은 그를 문책하거나 응징하지 못하였다. 당시 혜종의 후견인으로서 왕규와 대립 관계에 있던 박술희 역시 자신의 신변 보호에 급급하였다. 그리고 왕실 내에서도 혜종의 이복동생 왕요(王堯: 뒤의 정종(定宗))는 서경(西京)의 왕식렴(王式廉) 세력과 결탁,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혜종은 주위에 항상 갑사(甲士)들을 수행시켰고, 암살 위협에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혜종이 즉위 이래 병석에 눕게 된 것도 이러한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결국, 왕규의 모역(謀逆)은 요와 결탁한 왕식렴의 서경 군사력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만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왕요가 왕식렴 세력과 결탁한 것은 왕규의 모역에 대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혜종의 왕권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왕요의 왕위 계승을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왕요는 945년(혜종 2)에 서경 왕식렴의 군사력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왕규를 갑곶(甲串)에 귀양 보낸 뒤 사람을 보내어 죽였으며, 그 무리 3백여 명도 죽였다. 한편, 혜종의 후견 세력인 박술희도 살해하고, 그 책임을 왕규에게 전가시켰다. 박술희는 태조의 유명(遺命)까지 받은 중신(重臣)이었으므로 살해의 진상을 은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요는 이처럼 왕위 계승에 방해가 되는 적대 세력을 소탕한 뒤 왕위에 올랐다.
왕규의 난에 대해서는 왕규가 혜종을 암살해야 할 만한 합당한 동기를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정종이 자신의 왕위를 차지하는 명분을 얻기 위해 왕규를 희생양으로 삼았다거나, 정종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광주 세력의 약화 및 고명대신으로 상징되는 태조 공신 세력에 대한 정리의 성격으로 보는 견해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왕규의 난은 결과적으로 왕요의 왕위 계승에 명분을 주고, 또 일을 쉽사리 성취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후 정종과 광종의 왕권 강화로 이어지는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