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왕규는 고려 전기 태조에게 귀부하였다가 혜종 때 왕위쟁탈전을 벌였던 광주(廣州) 출신의 호족이자 관리이다. 그는 두 딸을 태조와 혼인시켜서 광주원부인과 소광주원부인으로 삼은 데 이어 또 다른 딸을 혜종의 후광주원부인으로 삼으면서 점차 막강한 정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혜종의 뒤를 이어서 자신의 외손자이자 소광주원부인 소생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힐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혜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왕위에 오른 자는 그의 경쟁자였던 왕요였으며, 이로 인해 왕위에 오른 정종에 의해 왕규는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정의
고려 전기, 태조에게 귀부하였다가 혜종 때 왕위쟁탈전을 벌였던 광주(廣州) 출신의 호족이자 관리.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 활동
그렇지만 944년(혜종 1)에 비로소 세워진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興寧寺澄曉大師寶印塔碑)」에 절중(折中)의 속제자로 등장하는 그가 아직 좌승(佐承)의 지위에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왕규가 대광(大匡)의 지위에 오른 것은 혜종이 즉위한 뒤의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규는 자신의 또 다른 딸을 혜종의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으로 삼으면서 막강한 정치 권력을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계기로 혜종의 이복동생이자 서경(西京: 현, 평양)의 왕식렴(王式廉) 세력과 결탁하여 몰래 모반을 도모하고 있었던 왕요(王堯)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를 벌였다. 그러나 혜종은 이때 자신의 신변보호에만 급급할 정도로 왕권이 미약하였다.
이에,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이자 소광주원부인 소생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몇 차례 혜종을 죽이고자 하였다. 한번은 혜종이 밤중에 잠든 틈을 타서 몰래 심복을 보내 암살을 시도했으나, 도리어 잠에서 깬 혜종의 주먹에 맞아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 또한 왕규 자신이 직접 밤에 심복들을 거느리고 신덕전(神德殿)으로 쳐들어갔다가, 최지몽(崔知夢)의 건의에 따라 혜종이 이미 침소를 중광전(重光殿)으로 옮긴 뒤라서 실패하기도 하였다.
정국이 이처럼 어수선해졌을 때 혜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요가 서경에 있던 왕식렴(王式廉)의 군대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결국 왕위를 차지하였다. 이때 왕위에 오른 정종(定宗)은 곧바로 왕규를 붙잡아 갑곶(甲串)에 귀양을 보냈다가 사람을 보내어 죽였다. 그리고 그의 일당 3백여 명도 아울러 처형하였다. 그 결과, 왕위쟁탈을 위한 왕규의 계획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러나 왕규의 난(王規의 亂)에 대해서는 오히려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왕규를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興寧寺澄曉大師寶印塔碑)」
단행본
- 『역주나말여초금석문』 (혜안, 1996)
- 김갑동, 『고려전기 정치사』 (일지사, 2005)
- 심재석, 『고려 초기 정치사 연구』 (미주, 2014)
논문
- 강희웅, 「고려혜종조 왕위계승란의 신해석」 (『한국학보』 7, 일지사, 1977)
- 이종욱, 「고려초 940년대의 왕위계승전과 그 정치적 성격」 (『고려광종연구』, 일조각, 1981)
- 임영희, 「고려 혜종의 죽음과 정종의 왕위계승」 (『역사학연구』 75, 호남사학회, 2019)
- 하현강, 「고려혜종대의 정변」 (『사학연구』 20, 한국사학회, 1968)
- 한정수, 「고려 초 왕규의 난에 대한 재검토」 (『역사와 실학』 62, 역사실학회, 2017)
- 瀨野馬熊, 「高麗惠宗朝の內亂」 (『史學雜誌』 10, 1926)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