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신양백(新陽伯) 왕전(王佺)의 아들로서, 제안후(齊安侯)에 봉해진 뒤 원종의 딸 경안궁주(慶安宮主)와 결혼하였다가 뒤에 다시 충렬왕의 딸인 정녕원비(靖寧院妃)와 재혼하였다.
1276년(충렬왕 2)에 김방경(金方慶)과 더불어 반역을 모의하였다는 무고를 받고 투옥되었다가 혐의가 없자 석방되었다. 1295년에 삼사사(三司使)가 되었고 대군(大君)에 봉해졌다.
1308년에 충렬왕이 죽자, 폐위되어 10여년간 원나라에 머물러 있던 충선왕이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충선왕은 즉위한 지 두달 뒤인 그해 11월에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고 재위기간 동안 한번도 본국에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연경(燕京)에서 전지(傳旨)를 받아 정치를 수행하던 이른바 전지정치(傳旨政治)를 하게 되자, 왕숙은 당시 고려의 왕이 당연직으로 맡게 되어 있던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승상직(丞相職)을 대행하던 권서정동행성사(權署征東行省事)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또한 원나라에 머물러 있던 충선왕의 전지를 받아 국정을 대행하기도 하였다. 1311년(충선왕 3) 삼중대광 부원대군(三重大匡府院大君)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