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자는 천은(天隱)이다. 태조의 종제인 영해공(寧海公) 왕만세(王萬歲)의 7대손이며, 상사봉어(尙舍奉御)로 추봉된 왕이민(王里民)의 아들이다. 어려서 수령의 눈에 띄어 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1107년(예종 2) 과거에 합격한 뒤 관례에 따라 양온승동정(良醞丞同正)이 되었다. 1112년(예종 7) 진양사록 겸 장서기(晋陽司錄兼掌書記)가 되었으며, 제안부녹사(齊安府錄事)·대원부전첨(大原府典籤)·국자박사(國子博士)를 거쳐 진양통판(晋陽通判)으로 있으면서 해적을 물리치는 데 공훈을 세워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다.
그 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비서승(祕書丞)·공부낭중(工部郎中)·비서소감(祕書少監)·병부시랑(兵部侍郎)·추밀원좌승선(樞密院左承宣)·이부시랑·지주사(知奏事)·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지추밀원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142년(인종 20) 3월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고, 같은 해 12월 이부상서가 되었다. 1144년 추밀원사 판삼사사(樞密院使判三司事)로 있었는데, 양부(兩府)에서 청렴한 관리를 추천하라는 왕명이 내려오자, 함유일(咸有一)을 천거하여 내시(內侍)에 소속되게 하였다.
뒤에 함유일은 공부상서에까지 승진하였다. 이듬해에 수사도 참지정사(守司徒參知政事)·판공부사(判工部事)·태자소보(太子少保), 같은 해 12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거쳐, 1146년(의종 즉위) 11월 평장사로서 치사(致仕)를 청하였지만 왕이 청렴하고 공평한데다 건강도 아직 좋으니 궤장(机杖)을 하사하며 만류하였다. 1149년(의종 3) 12월 문하시중으로 치사하였으며, 1159년(의종 13) 3월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강렬(剛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