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아버지는 충렬왕의 맏아들인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이다.
1310년(충선왕 2) 단양부원대군(丹陽府院大君)에 봉하여졌고 관계는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1320년(충숙왕 7) 등극사(登極使)로 원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그 다음 해 원나라의 개원(改元)과 태후의 책봉을 축하하기 위하여 다시 원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333년(충숙왕 복위 2) 왕이 원나라에 머무르고 있을 때 권서행성사(權署行省事)가 되었다. 충혜왕이 실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자, 같은 해 원나라로부터 귀국한 충숙왕을 평양부(平壤府)의 어용전(御容殿)에서 배알하고 찬성사(贊成事) 조적(曺頔), 밀직사(密直使) 정기(鄭頎) 등과 함께 국인(國印)을 충숙왕에게 바쳤다.
그 뒤 양인(良人)을 억압하여 천인을 만들어 사역하다가 이들이 정치도감(整治都監)에 의하여 다시 양인으로 복귀되자 이 사실을 원나라에 호소하고자 압록강을 건너가다가 재상들이 보낸 홀치(忽赤)에 의하여 잡혀 돌아왔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잠시 자기 집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다음 해 왕이 침원(寢園: 임금의 산소)에 춘향(春享: 봄에 지내는 제사)하고자 할 때 아헌관으로 참석하였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성이 함락되자 전리판서(典理判書) 인안(印安), 대호군(大護軍) 김서광(金瑞光) 등과 함께 항복하고 땅이 기름져서 살만한 곳과 기현(畿縣)에 곡식이 있는 곳을 적에게 알려주었다. 이로 인하여 다음 해 홍건적이 물러간 뒤에 감찰사의 탄핵을 받아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하고 자손에게도 금고형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