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이면서 하나의 관청이었다. 본래 비용사(備用司)로 불리던 것을 1310년(충선왕 2) 충선왕이 요물고로 개칭하였다.
관원으로는 사(使, 종5품) 1인, 부사(副使, 종6품) 1인, 주부(注簿, 종8품) 1인이 있었다. 요물고의 기능이 강화된 것은 1313년(충선왕 후5) 충숙왕이 즉위하면서 명희궁(明熙宮)을 혁파하고, 그 소속의 토지를 요물고에 이속시키면서이다.
그 뒤 기부·점탈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전토를 확장시켜 고려말에는 360개소의 장(莊)과 처(處)를 보유하고 있었다. 토지의 분포는 주로 경기에 집중되었는데, 동북면과 서북면에도 산재하고 있었다. 요물고는 조선시대에도 계속 존재하였는데, 사·부사의 인원은 같으나 주부가 2인으로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