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운현궁은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私邸)이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본궁이 되어 궁의 명칭이 붙은 곳이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흥선군의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이다.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 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에 해당된다. 원래 운현궁은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양관(洋館), 일본문화원, 중앙문화센터. 운현초등학교 일대까지 포함된 넓은 지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다.
현재의 운현궁 터가 복원되면서 대지를 동서로 크게 양분하여, 동편에는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二老堂)의 세 건물들이 들어섰고, 서편은 빈 마당으로 남겨 도로와 접하고 있다. 동편에 있는 세 건물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원군의 사랑채였던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 그리고 별당인 이로당 순서로 자리 잡고 있다. 노안당 남쪽에 원래 아재당(我在堂)이 있었으나 없어졌고, 이로당 북쪽에 있던 영로당(永老堂)도 원래 운형궁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개인 소유의 건물 운니동 김승현 가옥(서울특별시 민속자료, 1977년 지정)으로 되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되었다. 특히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가 가례를 치른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노안당은 전체적으로 정(丁)자형의 건물로 대원군이 국정을 의논하던 곳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운현궁에는 애초에 고종의 출입을 위하여 세웠던 외문 경근문(敬覲門)과 내문 공근문(恭覲門)이 있었다. 이것은 《승정원일기》 고종 1년(1864) 9월 1일 기사에 보이는 바로서 “운현궁의 새로 세운 어로(御路)에 외문은 경근문, 내문은 공근문으로 현판을 써 붙이도록 호조에 분부하라.”고 하였던 고종의 하교에 따른 것인데, 이러한 외문과 내문은 이제 그 기초만 남고 모두 사라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는 다만 외문의 기능을 하는 정문과 내문의 기능을 하는 솟을대문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 · 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했다.
1948년 미군정에 의해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되고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 관리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후손이 양도 의사를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를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