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본산이 지정된 때에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였다. 태조가 송도를 중심으로 10대 사찰을 지을 때 그 중의 하나로서 919년(태조 2)에 진경대사(眞鏡大師)가 창건하였다. 원통사(圓通寺)라고도 한다.
1731년(영조 7)에 영련(靈鍊) 등이 중창하였고, 1762년에 설조(說照)가 중건하였으며, 1796년(정조 20)에 계철(戒徹)이 중건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화월장로(華月長老)를 비롯하여 벽월(碧月)·영봉(泳峰) 등이 중수하였고, 1907년에 주지 장학규(張鶴奎)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약사당(藥師堂)과 승당(僧堂)이 있으며, 약사당 안에 약사여래석상이 있으나 오래된 유물은 아니다. 또, 절 뒤쪽에는 내원암(內院庵)이 있다. 내원암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626년(인조 4)에 인균(仁均)이 중건하였고, 1881년에 비구니 선명(善明) 등이 중수하였으며, 1934년에 비구니 계법(戒法)과 성화(性和)가 중수하였다.
이 절의 중요 유물로는 약사당 옆에 있는 부도(浮屠)와 법화경서탑(法華經書塔)이 있다. 부도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조각수법이나 모양 등이 보기 드문 것이다. 또, 법화경서탑은 다보탑(多寶塔)형의 『법화경』을 써서 두른 것으로, 띠를 두르듯 감아올리면서 법화탑찬시(法華塔讚詩)를 썼는데, 이와 같은 인탑(印塔)의 형식은 고려 때 크게 유행하였다고 전한다. 법화경서탑은 승방(僧房)의 단주(短柱)에 걸려 있다. 이 밖에도 연화반석고초(蓮花盤石古礎) 등의 석물들이 일부 전한다.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는데, 옛날 어느 사냥꾼이 수리를 쏘아 맞혔다. 그 수리가 성거산으로 달아났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 보니 다섯 마리의 새끼를 안고 죽어 있었다. 측은한 마음에 깨달은 바가 있어 사냥꾼은 활을 꺾어 버리고 수리를 묻어 준 뒤 절을 지어 원통사라고 하였으며, 수리의 무덤에 석탑을 세워 그 원통함을 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원통(元通)과 원통(怨痛)의 음이 같은 데서 나온 설화일뿐 사실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