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은 원집(元執). 전라남도 구례 출신.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자 일본군 축출과 매국노 타도를 목적으로 송병선·전우(田愚) 등과 담양·장성 등 전라남북도의 20여 군수를 찾아가 거의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그 뒤 김태원(金泰元)·김율(金聿)·백낙구(白樂九) 등과 함께 함평군 나산(羅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거병 당시 약 700여 명의 의병과 총기 500정을 휴대하고 나산을 거점으로 담양·영광·장성·창평·광주·동복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창평전투에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1908년 5월 30일 창평 용흥사(龍興寺)에서 접전하던 중 주요 참모진을 잃고 오른쪽 팔과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 뒤 의병장 양상기(梁相基)의 참모가 되었으나 양상기의 행동에서 의병활동 이외에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중지하도록 권고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상처를 입고 의진에서 탈퇴하였다.
이어 재기를 꾀하던 중 신분이 노출되어 잡혀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였으나 형이 그대로 확정되어 5월에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