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기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함평군 나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의병장.
이칭
이칭
원집(元執)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3년(고종 20)
사망 연도
1910년(순종 3)
출생지
전라남도 구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대한제국기 때, 함평군 나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의병장.
개설

별명은 원집(元執). 전라남도 구례 출신.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자 일본군 축출과 매국노 타도를 목적으로 송병선·전우(田愚) 등과 담양·장성 등 전라남북도의 20여 군수를 찾아가 거의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그 뒤 김태원(金泰元)·김율(金聿)·백낙구(白樂九) 등과 함께 함평군 나산(羅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거병 당시 약 700여 명의 의병과 총기 500정을 휴대하고 나산을 거점으로 담양·영광·장성·창평·광주·동복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창평전투에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1908년 5월 30일 창평 용흥사(龍興寺)에서 접전하던 중 주요 참모진을 잃고 오른쪽 팔과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 뒤 의병장 양상기(梁相基)의 참모가 되었으나 양상기의 행동에서 의병활동 이외에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중지하도록 권고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상처를 입고 의진에서 탈퇴하였다.

이어 재기를 꾀하던 중 신분이 노출되어 잡혀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였으나 형이 그대로 확정되어 5월에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조선독립운동』 1(김정명 편, 원서방, 1967)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1965)
집필자
박성수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