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이행(而行). 유식(柳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안택(柳安澤)이다. 아버지는 전농정(典農正) 유임(柳臨)이며, 어머니는 권숙(權肅)의 딸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유관(柳寬) 밑에서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고 경전에 밝았으며, 그릇이 크고 결단력이 있었다. 1393년(태조 2)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 이조·병조의 정랑을 지냈다.
140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이 되었다.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1409년 집의로서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의 불충(不忠)한 죄와 평양군 조대림(趙大臨)의 사병 혁파를 탄핵하다가 안악에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1411년에 좌사간을 지내고, 이어 좌부대언이 되었다. 1416년에 지신사(知申事)로서 소합유(蘇合油)를 진상하는 데 잘못을 저질러 다시 안악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왔다.
이듬해 홍주목사·경상도도관찰사·함길도도순문사로서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그 뒤 1422년(세종 4) 강원도관찰사로 전임되고, 이듬해 경기도도관찰사로서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역임하였다.
1428년 한성부윤이 되고, 이어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0년 악학제조(樂學提調)로서 신주조회악기(新鑄朝會樂器) 및 가자(架子)를 올렸고, 박연(朴堧)과 함께 「아악보(雅樂譜)」를 완성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어 좌군총제가 되어 이듬해 「용흥가(龍興歌)」를 지어올리고, 1432년에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4년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서 「진작가사(嗔雀歌辭)」를 지어 올리고, 1435년 예문관대제학으로서 구악(舊樂)을 정리하였다. 맹사성(孟思誠)·박연 등과 함께 조선 초기의 악학 정비에 공로가 컸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