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률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대동공보』의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한 항일운동가. 언론인.
인물/근현대 인물
출생 연도
1866년(고종 3)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함경북도 경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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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대동공보』의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한 항일운동가. 언론인.
개설

함경북도 경흥 출생. 1860년대 국경지대인 아지미(Adimi)에 정착, 1909년 러시아에 귀화하였다. 블라고베셴스크에서 러시아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9년 8월 대한제국 내장원 종목과 주사가 되었으며, 궁내부 번역관보, 번역관을 차례로 역임했다. 1903년 4월 주 블라디보스토크 통상사무과 서기생을 지냈다.

최재형(崔才亨)을 중심으로 한 이종호(李鍾浩) · 엄인섭(嚴仁燮) · 홍범도(洪範圖) · 최봉준(崔鳳俊) 등 북한출신 인사들인 이른바 북파(北派)에 속하였다.

1908년 『대동공보(大東共報)』의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언론을 통한 항일운동과 교민의 계몽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1910년 8월 러시아 당국에 의해 『대동공보』의 발간이 금지되자, 이종호 · 최재형 · 이강(李剛) 등과 더불어 신문의 재간을 위한 청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이종호로부터 500원과, 신문 재간을 위한 운동경비로 2,000원을 제공받았다.

1909년 안중근(安重根)의 하얼빈의거가 있자 엄인섭 · 김하석(金河錫) · 백규삼(白奎三) · 이종만(李鍾萬) 등과 협의하여 공동회를 만들었다. 공동회는 안중근유족 구제회라고도 하는데, 유족을 위한 의연금을 거두고 안중근의 구명운동도 전개하였다.

1912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모임인 신한촌회(新韓村會) 회장인 민장(民長)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자기의 본업이며 긍지를 가지고 있던 신문발행사업에 종사하기 위해 사임하고, 20인 평의원으로만 참여하였다. 이 밖에도 배일적 비밀결사인 기독청년회의 찬성원(贊成員)으로 정재관(鄭在寬) · 이종호 · 안창호 · 이갑(李甲) · 이강 · 유동열(柳東說)과 동지적 결합을 하였다.

1912년 5월 러시아 군무지사(軍務知事)로부터 신문발간 허가가 나오자, 유진률의 소유인 활판사(活版社)에서 인쇄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매주 일요일과 목요일 2회에 걸쳐 순조선어신문인 『대양보(大洋報)』가 발간되었다.

『대양보』는 유진률이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고 주필은 신채호(申采浩)였다. 논조(論調)는 일본의 조선통치에 대해 신랄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가득하였고, 조선 · 일본 · 청나라, 기타 조선인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시사문제와 잡보(雜報)를 취급하였다. 한때 재정적 후원자인 이종호와 불화가 있어 신문발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던져졌으나 해소되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14일 발행인 겸 편집인을 사임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서임급사령(敍任及辭令)」(1899.8.26, 1900.1.23, 1903.5.1.)
『안중근의 생애와 구국운동』(장석흥, 독립기념관, 1992)
『露領沿海州移住鮮人の狀態』(朝鮮駐箚憲兵司令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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