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릉(江陵). 평안북도 의주 출생. 영수(永秀)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한정희(韓定希)이며, 국어학자 창돈(昌惇)의 형이다.
선천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와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거쳐(1929), 1933년부터 1936년 사이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사학과를 다녔다.
그의 업적은 향가와 ≪계림유사≫의 해독을 통한 고대어연구, 속담연구, 『용비어천가』 주해, 국어의 형성에 관한 연구 등 네 분야로 간추릴 수 있다. ≪신동아≫ 등에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향가해독에 관심을 가져 오구라(小倉進平)와 양주동(梁柱東)의 연구를 기초로 졸업과 동시에 향가해독론을 펼쳤으며, 이러한 작업은 광복 후에도 꾸준히 계속되어 홍기문(洪起文)·정열모(鄭烈模)와 함께 북한 향가연구의 선도적 구실을 하였다.
<신라향가의 해독 소고(小考)>(『史苑』 50)에서 ≪균여전≫의 7수와 ≪삼국유사≫의 9수를 중심으로 잘못 읽거나 잘못 풀이한 대목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균여전의 향가주석>(『사해공론』 2-11, 1936)·<신라의 향가해석>(『신동아』 5, 1936)·<노인헌화가에 대하여>(『한글』 8-3, 1940)에서 더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광복 후에도 계속 이 방면에 관심을 가져 「서사어(書寫語)로서의 향찰과 그 표현」(『조선어연구』 2-3, 1950), 「신라향가의 독해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론의」(『조선어문』, 1956년 5호), 「홍기문의 저 『향가해석』에 대하여」(『조선어문』, 1958년 1호) 등 깊이 있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계림유사』 고려방언고」(『한글』 6-3, 1938)에서 마에마(前間恭作)의 업적에서 풀리지 못하였거나 잘못 읽은 어휘의 해독을 시도하였다.
속담론은 「이언에 나타난 가족제도」(『조광』4-3, 1938)와 「조선이언의 윤리성」 (『조광』5-2)의 두 편이 있다. <용비어천가 주해>는 『조선어연구』 1949년도 발행호에 6회 연재하였는데 마에마 이후 우리손으로 마련된 최초의 완결된 어학적 주석이다.
국어의 형성에 관한 연구는 「조선어에 있어서 종족어와 민족어의 구성에 관한 시론」(『조선어연구』2-1, 1950)에서 전개되었는데, 유물사관에 근거하여 우리 민족의 종족어와 인민어의 형성문제를 다루었으며 고대 부족국가들의 언어는 종족어로, 삼국시대 세 나라의 언어는 인민어로 간주하는 태도를 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