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호조참의, 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암유고』를 저술한 학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듬 해 증조부 윤선거와 종조부 윤증(尹拯)에게 추탈(追脫)의 화가 미치자 벼슬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가, 1722년(경종 2) 윤선거와 윤증의 관작이 복위되고 시호가 내려짐에 따라 사헌부지평에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 시강원진선(侍講院進善)으로 옮겼다가 이듬 해 사헌부장령에 강직(講職)을 겸하고, 이어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을 거쳐 단양군수로 나갔다. 1724년 하차은 사건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돌아왔으나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고, 1727년(영조 3) 진선과 집의를 거쳐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며,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듬 해 청주의 이인좌(李麟佐)의 난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던 중 난이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성에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것이 허물이 되어 파직되었다. 이듬 해 다시 승지로 복직된 뒤 1731년 호조참의, 1737년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학문에도 매우 전심하여 영조가 두 번이나 별유(別諭)로 소명(召命)하여 『주역』과 『성학집요』를 강의시킨 일이 있다. 저서로는 『경암유고(敬庵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 『경암유고(敬庵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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