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富川警察署性拷問事件)은 1986년 6월 6일과 7일에 노동 현장 위장취업 혐의로 연행된 여학생에게 부천경찰서 경장이 성 고문을 가한 사건이다. 부천경찰서 경장 문귀동은 노동 현장 위장취업자 수사 도중 여성 연행자 권인숙을 강제 추행하였다. 피해자가 증언을 하며 각종 집회와 성명서가 쏟아졌고 대규모의 변호인단이 꾸려져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그러나 검찰은 가해자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사건을 종결시켰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 후 재수사가 추진되어 가해자에 대해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1984년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경희대 여대생을 추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이 처음으로 사회 쟁점화된 것이다. 서대문경찰서와 청량리경찰서에서 두 달 간격으로 여대생들에 대한 성폭력이 일어나자 ‘여학생연합 여학생추행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가해자 사법 처리, 국회 진상조사단 파견 등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여성단체 중심의 대책협의회 외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서울지방변호사회도 각각 대책협의회나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으나, 검찰과 경찰의 끈질긴 방해와 협박, 회유로 사건은 해결되지 못한 채 대책협의회 활동은 흐지부지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84년 사건을 계기로 여성에 대한 폭력 사건과 피해 사례들이 사회적 문제로 쟁점화되었고, 여성단체들이 정치적 투쟁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진행되던 1986년 6월 6일과 7일에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장이 노동 현장 위장취업 혐의로 연행된 여학생 권인숙을 성 고문하였고, 6월 26일경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건이 알려진 후 피해자 권인숙은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함께 ‘부천경찰서 성 고문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사건의 피해자는 가해자를 고소하였지만, 가해자는 이에 맞대응하여 피해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맞고소하였다. 그러자 9명의 변호사들이 가해자인 문귀동을 포함하여 부천경찰서 수사과장 및 형사 6명을 고발하였다.
7월 16일에 검찰의 조사 결과 발표가 있었지만,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모략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고, 이후 옥중의 피해자는 단식 농성에 들어가고 재야 민주 세력과 대책 기구는 검찰의 조사 결과를 전면 거부하는 성명서를 쏟아 냈다.
7월 19일 명동성당에서는 ‘고문, 성 고문, 용공 조작 범국민폭로대회’가 열렸으며 각종 집회가 전국에서 열렸다. 사건이 외부에 알려진 후 불과 한 달 사이의 기간에 50~100여 만 부의 고발장이 전국에 뿌려졌고, 규탄 집회에 수천 명의 인파가 모여들 정도로 이 사건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매우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검찰과 여당, 언론에서는 좌경 의식화된 집단이 성을 정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면서 사실을 왜곡하고 문귀동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하였다. 피해자의 변호인단 166명은 이에 대해 재정신청을 냈으나 기각당하였는데, 1987년 6월항쟁 후 재수사가 추진되어 1989년 6월에 문귀동에 대한 징역 5년이 선고되고 피해자에 대한 위자료 지불 판결이 내려졌다.
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은 반독재민주화투쟁과 그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여성운동이 민주 세력과 연대해 투쟁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민주 세력이 광범위하게 연대함으로써 1987년 6월항쟁의 동력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서는 그때까지 있었던 거의 모든 성폭력 사례들을 망라한 자료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 고문을 성 모순의 결과로 보기보다는 탄압받는 민중의 문제로 의미화함으로써 계급 모순과 함께 나타난 성폭력을 당한 여성의 문제에 주목하지 못하는 한계도 존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