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법개정파문(勞動法改定波紋)은 1996년 12월 26일, 여당 의원에 의해 자본의 규제 완화와 유연생산체제를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안이 날치기 통과된 사건이다. 법안 통과 소식에 양대 노동조합총연맹은 총파업에 들어가고, 야당 3당이 무효화 헌법소원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김영삼이 1997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에서 개정안 철회 의사가 없음을 기만적 언사로 밝히면서 개정안 반대 투쟁은 민주주의 수호 투쟁으로 확장되었고, 1997년 여야 합의로 법안이 재개정되며 파문은 일단락되었다.
김영삼 정권은 1996년 4월, ‘신노사관계 구상’을 주창하며 자본의 대대적인 규제 완화, 유연생산체제라는 새로운 노동 통제 방식을 채택하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급격히 성장한 노동자운동을 체제 내부로 포섭하고자 하였다. 1996년 5월에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출범하여 노동법 개정 방향과 원칙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나 노사 간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하였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10월 9차 회의부터 위원회 회의에 불참하였는데, 14차 전원회의에서 정리해고제 입법화를 중심으로 한 노동관계법 개정 요강이 확정되었다. 11월 10일 정부는 노동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노사관계개혁추진위원회’와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실무위원회’를 설치해 노동법 개정을 정부 내에서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2월 11일 국회에 노동법 개정안이 제출되었는데, 정리해고, 파업 기간 중 대체근로 허용, 퇴직금 제도 폐지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는 노동계의 안보다는 자본가의 요구사항을 대폭 반영한 것이었고 '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의 합의 사항을 변형시킨 것이었다. 같은 날 안기부법 개정안도 제출되었는데,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제7조)와 불고지죄(제10조)에 대한 안전기획부의 수사권을 부활시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 입법 예고에 노동조합 측에서 맹렬히 반발하고 총파업을 예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12월 9일 비상 임시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총파업을 결의하였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역시 12월 9일부터 상경 투쟁, 국회 항의 투쟁, 삭발 농성 등을 벌였다. 12월 23일에는 ‘노동법개정투쟁본부 대표자회의’를 열어 이튿날부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전 단위노조 간부는 개정안이 처리될 경우 총파업을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996년 12월 26일 오전 6시, 신한국당 의원 154명이 버스를 타고 국회 본회의장으로 이동하여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 소식이 보도되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당일 모든 사업장에서의 총파업을 선언하였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역시 27일 총파업을 선언하였다.
야당 3당은 ‘반독재투쟁공동위원회’를 설립하고 영수 회담 요구와 헌법재판소에 개정안 무효화 헌법소원을 제출하였다. 여론 역시 개정안의 날치기 통과 형식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파괴한 데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총파업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1997년 1월 7일 김영삼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개정노동법 및 안기부법을 옹호하며 “개정노동법은 선진적인 수준의 법”이며 “선진국에서는 노동쟁의가 없다.”라는 발언을 하여 개정안 반대 흐름에 불을 붙였다. 이때부터 개정안 반대 투쟁은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항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성격으로 확장되었다.
1월 11일 전국 20여 개 지역에서 ‘범국민 결의대회’가 열려 10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고, 각계 대표들은 ‘노동법 · 안기부법 날치기 개악 무효화와 민주 수호를 위한 1997인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60여 개 지역에서 ‘노동악법 · 안기부법 완전 무효화와 민주 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종교계와 여성단체에서도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전국적이고 격렬한 반대 투쟁이 이어지자 결국 1997년 1월 21일 영수 회담이 개최되었고, 정부 여당은 노동법 재개정을 약속하였다. 노동계는 법안의 무효화 없는 재개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여야 합의로 몇 개의 핵심 조항만이 수정되어 통과되었다.
노동법 개정안의 내용과 개정법안의 날치기 처리 방식은 광복 이후 양대 노동조합총연맹을 처음으로 전국적인 연대 투쟁에 나서게 하였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동시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양대 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은 연대 합의 사항 발표, 공동기자회견, 공동의 대규모 집회 등을 통해 노동계급의 단결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 외환위기로 인해 대대적인 정리해고가 이루어졌고, 1998년 김대중 정권에 의해 근로자파견제가 입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