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金學順)은 1924년 중국 만주의 지린〔吉林〕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따라 만주를 떠돌다 아버지 사후, 1941년 양아버지가 일본군에 넘겨 만주에서 ‘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한국 상인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1946년 귀국한 후 결혼해 가정을 꾸렸으나, 한국전쟁 당시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마저 익사 사고로 잃었다. 이후 날품팔이, 행상, 파출부 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1990년 6월 일본이 군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하자 분노해 증언을 결심하였다.
공개 증언 후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고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는 여성 인권운동가로서의 삶을 지속해 갔다. 1997년 12월 8일 평생 모은 재산 2천여만 원을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에 기부하였고,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아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1997년 12월 16일 폐질환으로 서울 동대문 이화여대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최초로 공개 증언하였다. 그의 증언은 한일 양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에서는 ‘정신대 피해 신고전화’를 개설해 피해자의 증언을 모았다. 같은 해 12월, 다른 두 명의 피해자와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아시아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자 국제 사회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김학순의 이러한 활동에 다른 피해 생존자의 증언이 이어졌으며, 일본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단체들이 조직되었다. 1992년에는 일본 법정에서 일본의 만행을 증언함으로써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에게 사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2년 3월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의 뜻을 기려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이날을 ‘세계 위안부 기림일’로 정하고, 매년 다양한 캠페인과 연대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날은 2017년 12월 국회를 통과하여 공식적 국가기념일로 확정되었다.
2021년 김학순 증언 30주년을 맞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특별전시 ‘그날의 목소리’를 개최하였고, 8월 14일 기림일을 맞아 온라인 문화제가 열렸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약칭 정의기억연대)에서는 증언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증언의 역사적 의미와 향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의 과제와 방향에 관해 논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