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예산 출신. 용산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37년까지 장호원본당 보좌신부,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가톨릭연구』·『가톨릭청년』에 호교론과 성서신학에 관한 단편을 다수 발표하였다.
1938년 프랑스에 유학하여 소르본느대학에서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로마 라테란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48년 귀국하여 교황청전교회 한국지부장, 성신대학(聖神大學: 지금의 가톨릭대학 신학부) 학장(2대), 서울교구장 비서, 경향신문사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인보회(隣保會) 한국지부장으로 임명되면서 사회사업과 전교사업활동을 전개하여 1956년 일종의 사회사업학교인 구산후생학교(鳩山厚生學校)를 세워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1956년 사회반과 수도반을 분리하여, 수도반을 모체로 한 수녀회인 인보성체회(隣保聖體會)를 창립하였다.
사회사업과 수녀원 창설이 분리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하겠으며, 평소에 그가 강조한 인본주의는 ‘자신의 넘치는 행복을 이웃에 전하는 것이 참의미의 전교’라는 뜻으로 수녀원의 설립취지가 되었다.
1960년 안양 성나자로 마을 원장에 부임하면서, 병원·요양원·정착촌 등을 건설하였고, 나환자들에게 인간의 기본권과 평등을 강조하여 환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도록 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원조물자의 처리문제로 한때 나환자들과 갈등을 빚은 적이 있다. 또한, 간척사업·조림사업·미감아격리운동·고아원운영 등의 사업을 추진하다가 때로 실패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가톨릭교회 내부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63년 골롬바병원장, 경상남도 충무의 충렬여자중고등학교 교장을 거쳐 1964년 서울대교구 부주교로 임명되어 교구행정업무를 보다가 1966년 신병치료차 도미하였다. 그 뒤 미국에서 신병을 치료하다가 1971년 귀국하여 사망하였다.
『나한사전(羅韓辭典)』 발간, 『준주성범』 번역 등은 가톨릭학계에서 학문적 성과로 인정되고 있으며, 6·25전쟁을 겪은 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사회복지사업을 전개한 것은 높이 평가받고 있으나, 사회사업 활동기간에 다소 방만한 사업운영으로 사업에 실패하여 사회적 물의를 빚은 것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