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수백(秀伯). 아버지는 윤발(尹王+發)이고, 어머니는 유황(柳璜)의 딸이다. 동지중추부사 윤경(尹瓊)에게 입양되었다.
1608년(선조 41)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당시의 권신 박승종(朴承宗)의 부자가 대대로 교분이 있다 하여 불렀으나 거절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벽동군수로 있을 때 명나라에서 징병을 요구해오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휘하에 종군하여 요동에 건너가 군량운반의 임무를 다하고 돌아왔다. 그 뒤 박엽(朴燁)의 탄핵을 받아 낙향하였다가 인조반정 이후 다시 관직에 기용되어 옹진현령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부원수 이수일(李守一)의 명을 받고 마탄(馬灘)을 수비하던 중 적의 포로가 되었다. 난군(亂軍)에 합세하라는 이괄·한명련(韓明璉)의 권유에 대하여 도리어 반역의 죄를 꾸짖다가 살해되었다.
신장이 9척이나 되고 용모가 괴위(魁偉)하였으며 항상 호협하고 절개가 있는 선비들과 사귀었고, 특히 김응하(金應河)·박영신(朴榮臣) 등과 가까이 지냈다. 담력이 있는 종 결이(玦伊)가 항상 윤정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윤정준의 죽음을 보고 윤정준의 기마(騎馬)를 달려, 옹진에 돌아와 관인에게 말을 맡기고 통곡하면서 바다에 빠져죽었다.
난이 끝난 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파령군(坡寧君)에 봉해졌으며, 김천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