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기씨(奇氏).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회은(晦隱 또는 悔隱). 1602년(선조 35)에 출가하여 옥섬(玉暹)의 문하에서 행자생활(行者生活)을 거쳐 계(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 뒤 소요(逍遙)·호연(浩然)·각성(覺性) 등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고 선(禪)을 배웠다. 항상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당시 그의 뜻을 안 호남 안렴사(按廉使)의 천거로 1633년(인조 11)에 입암성장(笠巖城將)이 되어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을 만나 각성이 호남관찰사 이시방(李時昉)의 권유로 의승대장(義僧大將)이 되자 그의 참모로 출전하여 승병을 지휘하였다.
이듬해 여름에는 의병을 모집한 공적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겸하여 양호도총섭(兩湖都摠攝)의 벼슬을 받았으며, 1647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을 수호하였다.
1651년(효종 2)남옹성(南甕城)을 축성한 공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가 1660년(현종 1)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대장(僧大將)이 되었으며, 1663년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성부산 천주봉(天柱峯) 아래에서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비(碑)를 만들어서 광양의 백운산(白雲山)에 건립하였다.
언제나 주위의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고,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군장(軍將)으로서의 당당한 용태를 갖추었으며, 평시에도 금옥으로 장식한 의관을 착용하여 위엄을 보였으나 혁혁한 훈공(勳功) 때문에 희롱하는 자가 없었다. 문하에서 배출된 승장으로는 처상(處祥)과 광학(廣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