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남정(南正) 등이 중심이 되어 조국의 광복과 자유독립국가의 완성을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실천행동으로 대원 양성·농촌 부흥·친일분자 숙청·일본인 기관 파괴 등 국내공작과 전만통일공작(全滿統一工作)을 내세웠다.
구성원을 보면 고문 양기탁·남정, 단장 편강렬, 부단장 한동추(韓東樞)·승진(承震), 총무 김정관(金靜觀)·심준구(沈駿求), 재무 박옥산(朴玉山)·지응진(池應鎭), 회계 김사식(金士寔), 지휘 곽도송(郭島松)·백운봉(白雲峯), 검사감(檢事監) 지응승(池應昇), 국내주재특파로는 서울에 편강렬, 평안남북도에 김시율(金時溧) 등과 대원으로 김철부(金鐵夫)·박훈(朴勳)·김명제(金明濟)·김활송(金活松)·김석익(金石翊) 외 250여 명이었다.
근거지는 봉천성 회덕현(懷德縣)·장춘현(長春縣)·장가소과(長家燒鍋)·고유수(孤楡樹)·길림성(吉林省)·중마소(中馬所)·하얼빈(哈爾濱)·수도가(水道街) 외 27개 소가 있었다.
의성단은 정식 발족에 앞서 이들 지역에 1922년 11월부터 단기간에 단원을 훈련시키는 훈련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단원으로 하여금 농민이 편안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돕고, 부정분자의 망동을 저지하여 불의의 변고를 방지하도록 하였다.
편강렬의 지휘하에 남만주 각지에 있던 일본인 기관을 파괴하고 적과 친일분자들을 색출, 처단하였다. 또한, 안동(安東)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을 살해한 것을 비롯해 많은 친일 주구와 일본 관리들의 처단에 힘을 써 큰 공을 세웠다.
더욱이, 1923년 11월 15일 편강렬을 비롯한 단원 7명이 봉천에 있는 일본영사관을 습격, 일군경 200여 명과 시가전을 벌여 일본 경찰 17명을 살해하고 무사히 철수하였으며,
또 12월 27일에는 대낮에 단원 4명이 봉천의 일본 경찰서를 습격, 파괴하고 일본 경찰과 관리 6명을 사살한 뒤 무사히 귀환하였다. 이렇듯 1922∼1923년 사이에 맹렬히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에 일제도 상당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운동단체들에 의한 전만통일주비회(全滿統一籌備會) 조직에 호응, 활약하다 편강렬이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히자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제2대단장에 승진이, 제3대단장에 박성장(朴成章)이 취임하였으나 1924년 11월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통합하여 정의부를 성립시키고 발전적으로 해체하였다. →정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