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은 곡물과 더불어 중요한 식품의 하나로서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전매물로 정하여 도염원(都鹽院)을 설치하고 이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소금의 생산지인 염분(鹽盆 : 소금을 만들 때 쓰는 큰 가마)에서 수납하는 염세(鹽稅)는 이득이 많아 국가에서는 공로가 특별히 큰 사람에게 염분을 하사하였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귀족의 특권이 강대하여지면서 소금의 전매정책이 해이하여지고, 왕실과 귀족이 사리사욕으로 염분을 점탈하는 현상까지 보였다.
그리하여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소금의 전매정책을 강화하여 각염법(榷鹽法)을 실시, 왕실과 귀족이 사사로이 점탈한 염분을 국가에서 회수하고, 도염원을 민부(民部)에 이관시키며, 아울러 의염창을 설치하여 민간의 수요에 응하게 하였다.
당시 소금의 가치는 은(銀) 1근에 64석, 포(布) 1필에 2석이었다. 공민왕 때 민부에서 독립시켜, 관원으로 종7품의 승(丞) 1인, 종8품의 주부 1인을 두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도 의염창을 계속 운영하다가, 1394년 그 업무를 사재감(司宰監)에 이관하고 혁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