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전투 ()

목차
관련 정보
국방
사건
6·25전쟁 초기 의정부 정면을 방어하던 국군 제7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3사단과 제4사단 그리고 제105전차여단의 침공을 받아 치른 방어전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의정부전투는 6·25전쟁 초기 의정부 정면을 방어하던 국군이 북한군의 침공을 받아 싸운 방어전투이다. 1950년 6월 25일 동두천, 포천, 의정부를 공격해 서울을 점령하고 국군을 격멸할 계획을 세운 북한군이 4만 8천 명의 병력으로 공격해 왔다. 당시 의정부를 담당하는 국군은 4,500여 명만이 부대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동두천과 포천이 점령당하였다. 북한군의 서울 진입 방지를 위해 의정부를 사수하려고 인근 부대와 후방부대까지 투입했으나 실패하고 의정부는 6월 26일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의정부 전선이 무너지며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목차
정의
6·25전쟁 초기 의정부 정면을 방어하던 국군 제7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3사단과 제4사단 그리고 제105전차여단의 침공을 받아 치른 방어전투.
배경

북한군은 동두천과 포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축선에 주공 군단인 제1군단을 투입하여 1950년 6월 26일까지 서울과 한강교를 점령하고 한강 이북에서 국군의 주력을 격멸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북한군 제1군단은 동두천∼의정부 축선에 제4사단과 1개 전차 대대, 포천∼의정부 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투입하였다. 그리고 제2제대로 제13사단과 제15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제2제대까지 포함하여 이 지역의 전체 북한군 병력은 4만 8,000명을 상회하였다.

반면에 이 지역을 담당하던 국군 제7사단은 외출 · 외박으로 인해 4,500여 명만이 부대에 남아 있었다. 당시 국군 제7사단은 본래 제1 · 3 · 9연대로 편성되었으나, 사단예비인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고, 대신 충청남도 온양에 주둔하고 있던 제2사단 제25연대가 배속되어 6월 15일까지 의정부로 이동하도록 계획되었다. 그러나 제25연대는 수용시설 문제로 전쟁 발발 때까지 부대를 이동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제7사단은 예비연대가 없는 가운데 6 · 25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경과

북한군은 공격 첫날 의정부를 장악할 계획이었다. 6월 25일 새벽 북한군 제4사단은 제16연대를 전곡 남방의 사라동에 전개시키고 제18연대를 아미리에 전개시켜 전선돌파를 시도했다. 이 때 제16연대가 전곡에서 한탄강을 건너 초성리 방향으로 공격하고, 제18연대가 동이리 부근에서 임진강을 건너 도감포∼화방촌 간의 소로를 따라 공격했다. 또한 북한군 제107전차연대의 전차들이 3번 도로를 따라 초성역 쪽으로 공격해 왔다.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에 의해서 국군 제7사단의 38도선 경계부대인 제1연대 제2대대가 3시간 만에 와해되었다. 그러나 제1연대는 휴가 및 외박 등으로 인한 병력 부족, 그리고 성능이 뒤떨어지는 무기 및 장비에도 불구하고 이날 오후까지 동두천을 지켜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후 더욱 격렬해지는 북한군의 보병 · 전차 · 포병 협동공격에 밀려 동두천을 포기하고 이날 22시경 덕정으로 철수하였다. 덕정초등학교에 집결한 제1연대 병력은 약 70%정도로 감소한 상태였으며, 이곳에서 재편성과 부대정비에 들어갔다.

한편 포천방면에서는 북한군 제3사단 예하 제7연대가 양문리에서 국군 제9연대의 38선 경계부대 진지를 돌파하여 포천으로 공격하였고, 제9연대가 가양리∼포천∼내촌∼퇴계원으로 우회하여 국군 제9연대의 주력을 포위하고 측방에서 급습하려 하였다. 하지만 38도선 경계부대인 제2대대가 북한군의 파상공격에도 불구하고 적의 진출을 지연시켰다.

이로 인해서 개전 당일에 포천 접근로를 통해서 국군의 측후방을 강타, 포천을 조기에 점령하고 국군 제9연대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려던 북한군 제3사단의 기도는 일시 좌절되었다. 그 사이에 제9연대는 주력을 주저항선인 가랑산과 천주산으로 추진하여 배치하였다. 그러나 가랑산과 천주산에 배치된 제9연대 주력은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진출하는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25일 17시 경에 퇴계원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육군본부는 북한군이 서울로 진입하는 것을 조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의정부를 반드시 사수하겠는 결의 하에 서울 부근에 주둔한 부대뿐만 아니라 후방에 있는 부대들을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였다. 이때 수도경비사령부 제3연대와 제18연대, 포병학교 소속의 2개 대전차중대와 기갑연대의 장갑소대, 육군사관학교 생도대대를 비롯하여 대전의 제2사단, 대구의 제3사단, 광주의 제5사단이 황급히 출동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너무도 긴박했기 때문에 후방지역의 부대들은 완전편성을 갖추지 못한 채 대대단위로 각각 출발했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한 후에도 각각의 단위부대들은 후속하는 본대와 합류하지 못한 채 전선에 투입됐다. 따라서 대부분의 부대들이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과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에게 동두천과 포천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제7사단장은 다음날인 26일 아침에 역습을 감행하여 뜻밖에 동두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제2사단의 포천공격이 실패함에 따라 동두천에 진입한 부대들의 퇴로가 차단되어 버렸다. 따라서 그들은 분산 ·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다급한 상황에서 의정부 북쪽 금오리에 포진한 육군포병학교 제2교도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제2포대장 장세풍 대위 등과 함께 북한군의 전차를 공격하던 중 장렬히 전사하였다. 국군의 동두천과 포천 역습은 결국 실패하고, 26일 13시경 의정부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결과

의정부 전선이 무너지자 그 영향은 전선 전체에 큰 타격을 미쳤다. 문산 방면의 제1사단, 춘천 방면의 제6사단, 동해안 방면의 제8사단이 수도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전술적 · 심리적 충격을 받고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6·25전쟁 60대전투』(온창일 외, 2010)
『알아봅시다 6·25전쟁』(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6·25전쟁사: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2(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집필자
박동찬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