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중기에, 평안도도사, 형조정랑,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을 호종하다가 왕명에 의하여 군사를 모으기 위해 남하하였다가, 길이 막혀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이르지 못하고 노모를 찾은 일로 뒤에 언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그 뒤 개천군수를 제수받고 부임하기 전에 모친상을 치른 뒤 다시 북청판관이 되었으며, 정평부사·군자감부정 겸 춘추관편수관을 지낸 뒤 경기도와 충청우도의 어사로 나갔다. 이어서 군자감정·사간원정언을 거친 뒤 지평(持平)·장령을 거치고, 그 뒤로 예빈시의 부정, 사옹원·장악원·제용감·봉상시의 정 등을 지냈다.
광해군 때는 서인으로, 즉위년부터 삭탈관직에 문외출송(門外黜送)이 되어 양근(楊根)의 전사(田舍)에 돌아가 낙천재를 짓고 농사를 지으며 16년 동안 보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내섬시정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곧 물러났고, 그 뒤 여러 번 기용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음집(淸陰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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