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 당시 중랑장이었으나, 1177년에는 대장군으로 조위총의 나머지 무리 500여 명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낭중(郎中) 박소(朴紹)와 함께 조위총의 잔당을 설득하는데 파견되었다.
이 해에 북로처치사(北路處置使)로 군사문제를 의논하고자 하여 기병 500명을 보내어 영청(永淸)에 있던 서북면병마사인 두경승(杜景升)을 맞이하려 하였다. 그때 서경에 있던 반란군 우두머리인 낭장 김단(金旦)이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공격하니, 기병이 다 죽고 겨우 10여 명만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조정에서는 두경승과 서로 불화가 있었으므로, 이 사건을 평정하는 데 지장이 있다고 판단하여 이경백을 소환하였다. 석린(石麟)으로서 지서북로병마사(知西北路兵馬事)를 대신하게 하고, 두경승으로 처치사를 겸하게 하였다. 1179년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鄭仲夫), 아들 정균(鄭筠) 등을 제거하기 위해 결사대를 이끌고 궁궐로 잠입했을 때 궁 안에 있다가 죽음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