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백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중랑장, 대장군, 북로처치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179년(명종 9)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중랑장|대장군|북로처치사(北路處置使)
관련 사건
조위총의 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고려후기 중랑장, 대장군, 북로처치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 당시 중랑장이었으나, 1177년에는 대장군으로 조위총의 나머지 무리 500여 명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낭중(郎中) 박소(朴紹)와 함께 조위총의 잔당을 설득하는데 파견되었다.

이 해에 북로처치사(北路處置使)로 군사문제를 의논하고자 하여 기병 500명을 보내어 영청(永淸)에 있던 서북면병마사인 두경승(杜景升)을 맞이하려 하였다. 그때 서경에 있던 반란군 우두머리인 낭장 김단(金旦)이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공격하니, 기병이 다 죽고 겨우 10여 명만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조정에서는 두경승과 서로 불화가 있었으므로, 이 사건을 평정하는 데 지장이 있다고 판단하여 이경백을 소환하였다. 석린(石麟)으로서 지서북로병마사(知西北路兵馬事)를 대신하게 하고, 두경승으로 처치사를 겸하게 하였다. 1179년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鄭仲夫), 아들 정균(鄭筠) 등을 제거하기 위해 결사대를 이끌고 궁궐로 잠입했을 때 궁 안에 있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