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복(汝復), 호는 두곡(杜谷)·계곡(桂谷). 이함(李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인상(李麟祥)이다. 아버지는 군수 이통(李通)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유전(柳㙉)의 딸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1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을 받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승문원정자가 되었으며, 곧이어 저작을 거쳐 주서가 되었다.
반정 초기에 조정의 대소의 글씨를 잘 써서 왕으로부터 상으로 『동문선』 한 질을 하사받는 영광을 입었다. 곧 승진하여 전적·감찰 등이 되었고, 1624년 병조좌랑·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이 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언관으로 금령을 대대적으로 행하여 난 후의 처리를 잘하여냈고, 1625년에 홍문관수찬·사헌부지평·직강 등을 거쳐, 홍문관교리가 되어 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 폐지를 진언하였다. 이어서 사간원헌납·종성부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직후에는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부임하였는데, 서울과 가까워서 귀족공경(貴族公卿)이 많은 지방이었으나 일을 공정하게 잘 처리하여 칭송을 들었다. 곧이어 황해도감사가 되어 이이(李珥)의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수백본 만들어 올려서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게 하였다.
그 뒤 참찬관·양양부사·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글씨가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