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주(仁州)이다. 초명은 이수(李壽), 자는 원로(元老)이다. 이예(李預)의 아들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최유선(崔惟善)의 외손자이다.
1086년(선종 3) 5월 과거에 급제하여 궁전고판관(宮箭庫判官)이 되었고, 직한림원(直翰林院), 첨사부주부(詹事府主簿), 우습유 지제고(右拾遺知制誥)를 역임하고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서 서경유수판관이 되었다. 예종이 서경에 임하였을 때 백성을 잘 다스렸다 하여 칭찬을 받았고, 환도할 때 호종할 것을 명받았으나 사양하였다.
임기가 끝나자 중앙으로 돌아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 형부원외랑, 좌사낭중, 비서소감, 어사중승 등을 역임한 후 1110년(예종 5) 병부시랑이 되었는데, 이때 선군사(選軍司)의 일을 맡을 적임자로 재상들에 의해 추천되기도 하였다. 우간의대부, 국자감대사성 겸 직문하성, 우산기상시 동수국사 등을 역임 한 후 1117년(예종 12) 공부상서가 되었다.
1124년(인종 2) 겨울 검교사도 수사공 참지정사(檢校司徒守司空參知政事)로 발탁된 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1126년(인종 4) 2월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진압된 뒤에 12월 판이부사 감수국사(判吏部事監修國史)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6월 문하시중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왕좌재(王佐材) 등 33인을 뽑았다.
1126년 6월 이자겸의 난 때 세운 공으로 추충위사동덕공신(推忠衛社同德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 상주국(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上柱國)이 되고, 1128년 3월 문하시중이 되자, 여러 차례 치사를 청하여 1131년 동덕공신(同德功臣)을 더하여 치사(致仕)하였고, 1137년(인종 15) 7월 세상을 떠났다. 1130년 4월 양부(兩府)의 대신들과 의논하여 관리들에게 쌀을 차등 있게 내게 하고 그 쌀로 현성사(賢聖寺)와 영통사(靈通寺) 두 절에서 재(齋)를 올려 나라를 위해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내려줄 것을 기도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