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 출신. 1907년에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되고 ‘정미7조약’ 체결, 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략이 심화되어 가는 것을 목도하고 1908년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5조약’,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등 일제의 각종 침략조약에 반대하였고, 일제 침략자들을 이 땅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경상북도 일대를 중심무대로 활동하였는데 1909년 3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순흥군(順興郡) 소천리, 풍기군(豊基郡) 외면 신항리, 고교리 등지에서 일본 수비대, 헌병 순사대와 교전하였다.
이교영은 친일 한인에 대한 응징활동에도 주력하였다. 예천군 미울리의 일진회원 홍갈산(洪葛山)을 총살로 처단하고, 안동군 하암탑리에서도 성명 미상의 한인 밀정을 처단하였다. 군자금 모금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안동, 영천일대로부터 군자금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이교영은 일본군과의 교전, 친일 한인처단, 장기 항쟁을 위한 군자금 모금 등 다각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고, 1910년 일제 고등법원에서 교수형 판결을 받아 순국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