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벽동 출신. 독립운동 기간에는 왕현지(王現之), 진의로(陣義櫓), 이영철(李英哲), 이영준(李英俊) 등의 이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목도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중국 상해로 망명해 의열단에서 활동하였다.
그 후 광둥(廣東) 중산대학(中山大學) 이과(理科)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다니면서 1927년 광동지역 주요 독립운동단체인 유월(留粵)한국혁명동지회에 가담하여 상무집행위원에 피선되었고, 대한유일독립당촉성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중산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광시성(廣西省) 계림(桂林) 국민중학교 교원으로 일하였다. 1929년 김원봉 등 동지들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에 참여해 안광천·김원봉·박건웅·박문경·이현경·박차정 등과 함께 중앙부 7인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신한독립당파(新韓獨立黨派)의 조직대표 자격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1932년 의열단의 독립군 지도자 양성기관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비서 겸 교관에 종사하였다. 이 때 함께 활동한 인물은 교장 김원봉, 군사조에 이동화·김종·권준, 정치조에 김정우·안일래 등이 있다.
1933∼1935년에는 정치·물리·화학·경제학 교관을 담당하였다. 1935년 6월 20일 개최된 각 혁명단체 대표대회에 김원봉·윤세주와 함께 정대표로 참여하였고, 이 대회를 통해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1935∼1937년에는 민족혁명당 조사부장 겸 선전부장으로 있으면서 반일 전단을 작성해 일본군 진영 등에 배포하고 메가폰을 이용한 선전활동에도 주력하였다. 1940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겸 조선의용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이 후 중일전쟁 때 중경에서 순국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