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철산 출신. 이봉조(李鳳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독립운동 기간에는 일제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이수선(李秀善)·이영선(李英善)·이영전(李英全)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15, 16세 때 선천의 신성중학교에 다니면서 이미 임시정부 교통부의 전체사역(傳遞使役)에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기밀문서, 독립신문 등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20세 때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로 망명하려 했으나 국경에서 체포되어 1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업에 종사하며 때를 기다리던 중 일본 형사를 처단하고 북만주로 망명했으나 1926년 봄 하얼빈에서 다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본국으로 호송되다 탈출하여 상해에 도착하였고 곧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에 가입하였다.
가입 후 상해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있는 최병선(崔炳善)·장영환(張英煥) 두 동지의 구출계획을 추진했으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6년 4월 16일에는 상해의 중심가에서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그중 여러 명을 사살해 병인의용대의 의용을 떨쳤다. 이 때 한달 남짓 병상에 있을 정도로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1926년 융희황제(순종)가 서거하자 병인의용대에서는 인산일을 기회로 전국적인 만세운동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6월 1일 제2대장 김엄해(金奄海)의 인솔 아래 이덕삼·고준택(高俊澤)·김광선(金光善) 등은 국내로 잠입하기 위해 중국 기선 순천호(順天號)에 올랐다. 이들은 권총 각 1자루와 폭탄 3개를 소지하고 있었다.
기선이 양수포구(楊樹浦口)를 통과할 즈음 상해 경찰에게 발각되어 영국 관리에 양도되었고 다시 일본영사관에 넘겨졌다. 이덕삼은 일제에게 심문받다 심한 고문으로 인해 6월 7일 순국하였다. 6월 15일 동생 이덕용은 이덕삼의 유해를 찾아냈다.
이덕삼의 장례는 여운형(呂運亨)·안공근(安恭根)·이유필(李裕弼) 등에 의해 독립운동가 공장(公葬)으로 치러졌다. 이덕삼의 유해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묻힌 정안사(靜安寺)에 안치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