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해명(海鳴, 解明). 강원도 통천 출신. 3·1운동 때 향리 통천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해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졸업하였고, 1927년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6기로 졸업하여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28년 10월 북경에서 대본공사 사업을 추진하던 박용만(朴容萬)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살해하였다.
1929년에는 의열단(義烈團)과 한국혁명단(韓國革命團)에 입단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35년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당원으로 독립투쟁에 진력하였다.
1942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대표의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 문화부 총무과장과 광복군 총사령부 군법관(軍法官: 副領) 등을 역임하면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군장교로 참전, 공산군과 싸우다가 8월 대전지구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